[한국 인터넷 대중화 20년](6) TDX에서 CDMA까지 ETRI 전성기 이끈 경상현 초대 정통부 장관

1994년 대한민국 정보통신 정책을 총괄하는 컨트롤타워 ‘정보통신부’가 탄생했다. 김영삼 대통령은 정보통신에 미래가 있다며 우편 배송과 전화 시설을 관리하는 체신부에 과학기술처·공보처·상공자원부의 정보통신 관련 기능을 흡수·통합해 정보통신부로 바꾸는 대대적인 조직 개편을 단행했다.

초대 정보통신부 장관은 경상현 현 한국정보방송통신대연합(ICT대연합) 회장(77)이 맡았다. 정보통신부의 탄생은 한국 인터넷 역사에 어떤 역할을 했을까. 2014년 6월 20일 서울 상암동 누리꿈스퀘어 5층 ICT대연합 사무실에서 경 전 장관을 만났다. 피부가 희고 유순한 풍모의 경 전 장관은 깨끗한 목소리가 특히 인상적이었다.

▲ 경상현 현 ICT대연합 회장은 미국에서 공부를 마치고 75년 귀국해 한국원자력연구소를 거쳐 한국전기통신연구원(ETRI) 선임 연구부장, 한국전산원 원장, 체신부 차관, 정통부 1대 장관 등을 맡았다. 이때 TDX, CDMA 등 국가 차원의 기술 개발 주역으로 현장을 지휘했다. / 남강호 기자

그는 정보통신 분야의 대표적인 국책 연구기관인 한국전자통신연구소(ETRI) 소장을 8년간 맡으면서 전전자교환기(TDX), D램 반도체 개발에 참여했다. 오늘날 모바일 인터넷의 핵심 기술이 된 CDMA(코드분할다중접속)를 개발하는 데도 깊숙이 관여했다. 정통부 장관 시절에는 김영삼 정부의 초고속 인터넷망 밑그림을 그렸다.

그는 정치권과 안면이 없었고, 김영삼 당시 대통령과도 개인적 인연이 없었지만 94년 정통부 초대 장관으로 발탁됐다. 그는 발탁 배경에 대해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이라고 했다.

-서울대 공대를 거쳐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에서 핵공학을 전공했는데, 전공과 달리 정보통신 분야에서 활약했습니다.

“핵공학을 전공하면서 그 중에서도 세부 전공인 원자로의 자동제어 방법을 집중적으로 공부했어요. 시간이 지나면서 핵공학보다는 자동제어 분야에 더 깊이 빠져들었지요. 당시 미국 전화회사 AT&T 산하 연구소인 벨 연구소(Bell Labs)의 제어 분야에 일자리가 났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지원을 했습니다. 그때부터 통신과 본격적으로 인연을 맺게 된 것이지요.”

-한국에 돌아와서도 통신 분야와 계속 인연을 맺으셨지요?

“미국 대학에서 핵공학 강의도 했었고 1975년 귀국해서도 한국원자력연구소 연구원으로 일했습니다. 귀국하고 한달쯤 뒤 과학기술처에서 열린 회의에 참석했다가 다시 통신과 인연을 맺게 됐습니다.

그 회의에서 우연히 김재익 당시 경제기획원 부국장(훗날 청와대 경제수석비서관 역임)을 만나게 됐어요. 벨 연구소에 근무한 적이 있다고 했더니, 김 부국장이 전전자교환기(TDX)에 대해 아느냐고 묻더군요. 마침 벨 연구소에서 기계식교환기와 전자식교환기의 경제성을 비교하는 통신망계획을 연구한 경험이 있어 이런저런 말씀을 드렸습니다. 김 부국장은 당시 형편 없었던 국내 전화 시설에 대해 안타까워하며 이런 설비로는 경제 발전이 곧 한계에 부닥칠 것이라고 하더군요. 그는 경제발전으로 번 돈을 상당 부분 투자하더라도 전화 문제는 해결해야 한다는 분이었습니다. 전화는 필요할 때 언제든 쓸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셨지요.”

-TDX 개발에 대해 자문한 것을 계기로 TDX 국산화 프로젝트에도 참여하시게 되셨군요.

“네. TDX 개발이 국가적으로 중요한 프로젝트였기 때문에 원자력연구소에서는 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1976년에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연구원으로 파견됐습니다. TDX 프로젝트는 점점 커졌습니다. KIST에서도 별도 연구소를 만들어 TDX 프로젝트를 하자는 의견이 나왔어요. 1977년 KIST 부설 전자통신연구소가 만들어지고 내가 부소장을 맡았어요. 나중에 부소장이라는 직책이 아예 없어지면서 선행 연구부장으로 이름을 바꿔 같은 일을 하게 됐습니다. 전자통신연구소가 독립한 것이 오늘날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입니다.

어떤 기술로 TDX를 개발할 것인가, 기술 라이선스는 누구에게 받을 것인가, 어느 수준까지 국산화할 것인가 등을 연구하고 김재익 부국장팀에 자료를 보내줬습니다.”

-한국전기통신공사 기술 담당 부사장도 맡으셨습니다.

“81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통신이라면 모두 정부(체신부)가 운영을 맡았어요. 공무원들이 한 것이지요. 그런데 공무원의 인사제도라든가 조직 성격을 봐가지고는 새로운 기술을 그때그때 개발하고 받아들이고 통신망에 적용하기에는 한계가 있어요. 제약도 많습니다. 그래서 정부가 100% 투자하지만, 회사 형태로 만든 한국전기통신공사(지금의 KT)가 81년 12월 출범합니다. 정부 통신정책에 관여했기 때문에 한국전기통신공사가 출범할 때 기술 담당 부사장으로 갔습니다.

이듬해인 82년에 한국데이터통신주식회사(데이콤)가 만들어졌어요. 당시 전세계적으로는 컴퓨터끼리 정보를 주고받는 데이터 통신이 중요한 이슈로 떠오르던 때였어요. ‘우리도 빨리 해야한다’ ‘그럼 데이터통신 업무를 누가 주도적으로 할 것인가’ ‘통신공사가 만들어졌으니 전담 부서를 내부에 둘 것이냐, 그렇지 않으면 별개 회사를 만드는 게 낫겠느냐’ 하는 논의가 있었어요. 결론적으로 정부는 통신공사는 전화 시스템 확장하는 일만 해도 많으니, 데이터통신을 전담하는 별개 회사를 만들자고 결론을 내렸어요. 전기통신공사 부사장으로서 데이콤 설립추진위원회 위원을 맡기도 했었습니다.”

-1984년 다시 ETRI로 돌아가 소장이 된 후 8년 재임하셨습니다. 역대 ETRI 소장 중 최장수 재임 기록을 갖고 있는데요. 특별히 기억 나시는 일이 있는지요.

“8년이나 있다 보니 지금 보면 우리나라 정보통신을 변화시킨 굉장히 큰 프로젝트를 여러개 했습니다. 삼성반도체통신, 금성반도체 같은 민간회사들과 손잡고 메모리 반도체(D램)를 개발한다든가 중형컴퓨터(타이컴) 개발해 행정전산망을 국산화했고, 나중에는 CDMA(부호분할다중접속) 방식의 휴대통신을 시작해 ETRI가 초기 단계를 맡아서 했었던 기억이 납니다.

당시는 국내에 정착돼 있던 기술이 없을 때니, 지금 우리가 필요로 하는 정보 통신을 현대화하기 위한 중요한 기술들을 소장으로 있는 8년 동안 거의 다 시작했다고 볼 수 있지요. ETRI 연구원들은 밤새 일하는 분위기였습니다. 당시에는 나라 전체가 각계각층에서 오랜만에 정말 뭔가 돼 간다, 잘 먹고 살게 되는구나 하는 기분을 느낄 때에요. 연구실 불이 밤새 꺼지지 않을 정도로 연구원들은 열심히 했고, 구멍 가게 하는 사람들은 나름대로 그렇게 열심히 일해 정말 나라의 숨통이 트이던 그런 시절입니다.”

-우리나라 디지털 이동전화 방식의 표준이 된 CDMA 기술 개발도 직접 챙기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한국전기통신공사와 데이콤이 출범할 무렵에 전세계적으로는 이동통신을 쓰고 있었어요. 우리나라도 1984년부터 아날로그 방식으로 이동통신을 시작하기는 했어요. 그런데 전세계는 디지털 기술을 사용하고 있었거든요.

ETRI에 돌아와서 연구원들에게 앞으로 3~4년 줄테니 디지털로 이동통신을 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개발하라고 했어요. 후발주자였기 때문에 전 세계 기술 동향 연구부터 시작했습니다. 다른 나라에서는 디지털 이동통신에 관한 기술 개발을 마치고 상용화하려는 시점이어서 기술을 사오는 것이 최선이었어요. 90년대 초 마침 미국의 퀄컴이라는 조그만 회사가 CDMA라는 기술을 연구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됐어요.”

-퀄컴 기술을 눈여겨 본 이유가 따로 있나요?

“이동통신 기술을 사용할 수 있는 라이선스를 얻는 것조차 굉장히 어려웠습니다. 모토로라는 TDMA(시분할다중접속)라는 디지털 기술이 있었지만, 우리에게 라이선스를 줄 생각이 전혀 없었어요.

퀄컴은 당시 벤처였는데, 연구 인력도 연구비도 부족한 상황이어서 우리와 여러모로 협력할 자세가 되어 있었습니다. 또 퀄컴의 CDMA 기술은 TDMA보다 훨씬 더 좋은 기술이라는 판단도 있었어요. 코드분할이 시간분할보다 같은 주파수를 효율적으로 쓸 수 있거든요. 도청하는 것도 쉽지 않고, 운영도 비교적 간단했습니다.

문제는 상업성이었습니다. 이 기술을 얼마나 단기간에 상용화할 수 있느냐가 관건이었습니다. 상용화 시점을 100% 자신있게 확신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요. 다만, 우리는 기술자로서 판단을 했습니다. 위험 부담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정부(체신부)에 3년 내에 상용화할 것이라고 보고했습니다.”

-당시 벤처에 불과했던 퀄컴과의 제휴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90년대 초 당시 ETRI는 정부에 투자를 통해 기술 라이선스를 획득하자고 설득했습니다. 퀄컴이 CDMA 기술을 개발하는 데 필요한 자금 일부를 투자하고, 동시에 한국인 기술자들이 연구 과정에 깊이 참여해 기술 바닥부터 알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91년 5월 ETRI 이름으로 퀄컴하고 CDMA 기술을 공동 개발하는 계약을 체결했습니다.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첫 해에 140만달러(약 14억원)가량을 연구비 명목으로 주고 우리 제안대로 ETRI 연구원 30~40명을 미국으로 보냈습니다. 가족들까지 다 보냈어요. 퀄컴 직원인 것처럼 생각하고 밑바닥부터 배워가지고 오라고 했습니다.

사실 퀄컴에 투자한 돈은 많지 않은데, 연구원 체류비가 적지 않게 들었지요. 연구원 30여명을 가족까지 먹여 살리고 여비도 제공해야 했으니까요. 이 프로그램을 1년쯤 하니, 연구원들도 상당히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1년 후에는 기술을 배워오는 단계를 넘어서 우리나라 제조업체가 기술을 배워야 한다는 것으로 방향을 잡았어요. 당시 삼성전자, LG전자, 팬택 같은 회사들이 ETRI와 손잡고 CDMA 개발·시험하고 상품 만드는 일에 참여했어요.”

CDMA는 ETRI가 미국 퀄컴과 공동 개발한 2세대 디지털 이동통신 기술이다. 사용자가 시간과 주파수를 공유하면서 신호를 송·수신하기 때문에 기존 아날로그 방식보다 통화품질이 우수하다. 1996년 우리나라에서 세계 최초로 상용화 서비스가 시작됐다. 이후 미국·일본·중국·러시아 등이 잇따라 CDMA를 표준 기술로 선택하며, 유럽식 이동통신 기술인 GSM과 경쟁 구도를 형성했다. 삼성전자·LG전자 등 국내 휴대폰 제조사들은 CDMA 확산과 더불어 메이저 휴대폰 업체로 성장했다. 조그만 벤처회사였던 퀄컴 역시 로열티(특허사용료)를 챙기며 거대 통신업체로 거듭날 수 있었다. CDMA 기술 개발을 주도한 ETRI 역할이 결정적으로 작용한 것이었다.

▲ 경상현 ICT대연합 회장의 정통부 장관 시절 모습. 95년 초 조선일보와 취임 기념 인터뷰를 하고 있다. / 조선일보DB

-94년 정보통신부가 생기면서 초대 장관으로 발탁된 배경도 궁금합니다.

“김영삼 대통령께서 정통부 만들기 직전 저는 체신부 차관이었습니다. 체신부를 정통부로 바꾸면서 과학기술처, 상공부로 분산돼 있던 정보통신 관련 일을 정통부 한 곳에 모았어요. 정통부를 만들면서 누가 장관을 하면 좋으냐 하다가 아무래도 제일 큰 덩어리였던 게 체신부였고, 당시 제가 차관이었으니 자연스럽게 후보자로 제 이름이 올라갔었죠. 운이 좋게 낙점됐습니다.”

-정통부로 이름을 바꾸니, 우수한 관료들이 정통부로 몰렸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정통부로 이름을 바꿨다고 우수한 인재들이 몰린 것은 아닙니다. 정통부가 만들어진 게 1994년이니 최소 그 10년 전부터 공무원들이 자발적으로 오는 분위기였다고 보면 됩니다. 전화시스템이 컴퓨터 기술과 합쳐지고, 데이터 통신 한다고 해서 컴퓨터끼리 통신하던 때니까요. 70년대 중후반만 해도 체신부(정통부 전신)로 가겠다는 사무관은 거의 없었는데, 1981년쯤 되니까 너도나도 체신부로 가겠다고 해서 상위권만 붙였어요. 나머지 지원자는 할 수 없이 경제기획원으로 가던 시절이었지요. 좋은 인재들이 몰렸으니 좋은 정책들이 생겨날 수 있었다고 봅니다.”

-정보통신사에서 김영삼 대통령은 어떤 역할을 했다고 보십니까.

“김영삼 대통령께서 1994년 11월 인도네시아 보고르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 참석하셨어요. 그때 모든 부처에서 이런 말씀을 해주시면 좋겠다고 적어냈었는데, 정보통신부에서는 혼자 잘 되는 것보다 아태 지역 전체가 정보통신 분야 잘 되면 결국 우리도 덕을 많이 볼 것이라는 의견을 냈습니다. 하다못해 우리 시설이나 장비, 단말기를 팔 수 있고, 그쪽에서 값싸게 만든 것을 사오기도 하고요. 기술적으로 사람들도 교류할 수 있습니다. 대통령께서 그 얘기를 마침 정상회의에서 하셨던가봐요.

보고르 다녀온 후 대통령께서 크게 강조한 것이 세계화였고 세계화를 하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매개체가 정보통신이라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대통령께서 다른 정상들이 모인 자리에서 APEC 정보통신 장관회의를 제의했고, 결국 다음 해인 95년 5월 서울에서 회의를 주최했지요. 정보통신 관련해 사람들의 관심을 모았다는 점에서 대통령께서 큰 역할을 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민간 부문에서도 정부가 어떻게 하느냐가 상당히 좋은 영향을 줍니다.

김 대통령은 1995년 정보화촉진기본법도 제정했습니다. 우리나라는 전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정보화 촉진을 위한 틀을 만든 국가 중 하나였지요. 김 대통령은 CDMA(코드분할다중접속) 상용화도 독려해주셨어요. 정보화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졌고 많은 업적을 낸 대통령 중 한 분이라고 봅니다.”

-1990년 대 초반 앨 고어 미국 부통령이 이른바 ‘인포메이션 하이웨이(정보고속도로)’를 주장했었지요. 우리나라도 영향을 받았습니까.

“받았지요. 우리 정부가 추진했던 초고속 정보통신망이란 게 실질적으로는 앨 고어가 얘기하던 미국의 국가정보기반(NII·National Information Infrastructure) 프로젝트에요. 앨 고어는 상원의원 시절부터 그런 얘기를 했었는데, 빌 클린턴이 대통령이 되면서 부동령이 되니까 본격적으로 미국 정부의 가장 중요한 목표 중에 하나로 초고속 정보통신망을 구축하겠다고 했었어요.

1980년대 정부가 하는 모든 일을 컴퓨터화하자 해서 국가기간전산망(행정전산망·금융전산망·교육연구전산망·국방전산망·공안전산망으로 구성)을 추진했고, 1991년 사업을 마치면서 2단계 사업을 준비했었어요. 똑같은 기술 가지고 똑같은 방법으로 할 것이냐, 근본적으로 새로 나온 기술을 받아들일 것이냐 하고 고민하고 있었지요. 92년 한국전산원 원장할 땐데, 마침 앨 고어의 초고속 정보통신망 콘셉트를 눈여겨 봤었어요. 이 개념을 차세대 행정전산망 사업 구상할 때 합쳐 넣었습니다. 이게 우리가 이야기하는 초고속 정보통신망의 시작이라고 볼 수 있지요. 사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건 제가 장관하던 95년부터였습니다.”

국가기간전산망 사업은 정부가 국가 차원에서 전략적으로 수행한 정보화 사업이다. 1단계 사업은 1987년부터 1991년까지 행정전상망, 금융전산망, 교육연구전산망, 국방전산망, 공안전산망을 구축한 것으로 마무리됐다. 2단계 사업은 초고속 정보통신망 설치를 목표로 1992년부터 1996년까지 추진됐다.

▲ 김영삼 전 대통령이 1997년 3월 청와대를 방문한 앨 고어 미국 부통령과 오찬을 함께 하기 앞서 악수하고 있다. 김 전 대통령은 앨 고어의 NII 개념을 벤치마킹해 초고속 정보통신망 구축 정책을 본격화했다. / 조선일보DB

-2008년 이명박 정부 출범하면서 정통부가 해체됩니다. 초대 장관으로서 씁쓸하셨겠습니다.

“정통부 없어진 것이 6년 반 전이던가요. 그때는 때가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최근 사물인터넷이니 빅데이터니 얘기들 많이 하는데 이런 것들이 앞으로 10~20년 동안 우리 생활, 우리 사회를 굉장히 변화시킬 것이리는 감이 온단 말이지요. 그렇다면 적어도 정부의 어느 구석에서는 이런 걸 전담하는 사람들이 있어야 합니다. 물론 미래창조과학부 어느 담당 과가 있어도 총괄 컨트롤타워에서 집행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지요. 전담 공무원이 있겠지만, 결국 최종적으로 자원을 배분하는 사람은 장관입니다. 사물인터넷을 현실화하는 데 얼마를 쓰고, 뭐 하는 데 얼마를 쓰고 해줄 사람이 장관인데, 미래부 장관은 여러개 일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관심이 흩어질 수밖에요. 정통부가 있을 때는 장관이나 그 밑에 일하는 누구나 같은 생각을 했었어요.”

-지금이라도 부활하는 게 맞다고 보십니까.

“할 수만 있다면요. 그런데 그냥 정통부라는 이름만 붙이는 정부부처가 생겨나는 수준이어서는 안 됩니다. 일 제대로 하려면 상당히 고생해야 해요. 굉장히 시간도 필요하고, 세팅 작업도 필요하지요.”

-2000년부터 3년간 미국 상무성 주도로 만든 비영리기구인 세계인터넷주소관리기구(ICANN)’ 이사로 활동하셨습니다. 그동안 인터넷은 미국이 관리해왔던 것인가요. 

“미국에서는 95년에 인터넷을 소위 상업적으로 쓸 수 있게 했어요. 미국에서 상업화를 허용하니 컴퓨터 네트워크 특성상 전세계로 퍼지고 유럽에서도 다음날 장사하겠다고 야단이었어요. 그러다 보니 웹사이트 명칭은 마음대로 하지 말고 규칙이 있어야 한다고 해서 미국에서 98년 만든 게 ICANN이에요. 상업적으로 활용되는 네트워크를 질서를 유지하면서 발전하도록 필요한 룰을 정하자는 거였지요.

이 과정에서 아무래도 미국 영향력이 제일 많이 작용할 수밖에 없었어요. 전 세계 인터넷 주소를 할당 관리하는 데 의견을 내려면 굉장이 깊이 연구해야 하거든요. 어떤 문제가 생기는지, 이용하는 사람들 내지는 제3자들이 얼마나 피해를 볼 수 있는건지요. 그런데 모두가 납득할 수 있는 걸 할 수 있는 사람(기관)이 많지가 않아요. 능력가 없어서가 아니라 연구하는 데 돈이 굉장히 많이 들거든요. 인터넷주소(URL)를 어떤 식으로 바꿔서 5만개쯤을 10분 안에 쏴볼테니 네트워크 상태가 어떤지 실험한다고 칩시다. 돈도 필요하고 전문성도 있어야 해요. 미국은 직접 만든 것이기 때문에 속속 많이 알기도 하고, 상대적으로 돈을 낼 수 있는 여유도 있지요. 그점에서 인터넷이 미국 영향 아래에서 돌아갔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ICANN 이사 활동 이후 현재 ICT대연합을 이끌기까지 어떤 일을 하시며 지내셨는지 궁금합니다.

“ICANN 이사하기 전인데 정통부 장관을 1년쯤 하고 나와서 96년부터 한국과학기술원(KAIST) 테크노경영대학원에서 최근 한 3년 전까지는 초빙교수로 있었어요. 그 중간에 2006년 1월부터 고려대에서 전자공학과 석좌교수로 1년쯤 있었고 3년 전 나이도 있고 해서 퇴직했습니다. ICANN 이사는 상임이 아니었고 카이스트 교수 하는 도중에 했던 것입니다. ”

-2013년 10월 ICT 대연합을 출범하고 초대 회장을 맡으셨습니다. ICT대연합은 ‘ICT계의 과기총(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을 표방하고 계신다고요.

“과학기술쪽은 과학, 물리, 기계공학, 전자 등 분야별 단체, 학회가 여러개 있어요. 과학기술 분야 중 어느 한쪽이 이득을 보려다가 다른쪽에는 엉뚱하게 불똥이 튈 수 있습니다. 그래서 과기총이 조정하는 역할을 하는 것인데, ICT대연합도 그런 일을 하려고 합니다.

ICT 관련 단체들이 굉장히 많아요. 지방에 있는 것까지 포함하면 100여개쯤 될 겁니다. 그렇게 하다보니 뜻하지 않게 의견이 달라서 무슨 일을 추진할 때 이쪽에서 하는 게 저쪽에 뜻하지 않게 기술적·사업적 피해를 주기도 합니다. 그래서 ICT 내부의 전체적인 뜻을 모으고 같이 발전해나가는 방향을 모색하고 조정하는 게 하나 필요하다고 생각해 ICT대연합을 작년 말 만들었습니다.”

장우정 기자 woo@chosun.com
류현정 기자 dreamshot@chosun.com

0 Comments

No comments!

There are no comments yet, but you can be first to comment this article.

Leave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