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인터넷 대중화 20년](5) 한국 인터넷 아버지이자 스승 전길남 KAIST 명예교수 ①

– 한국 인터넷 효시를 만들고 창업과 연구의 요람을 이끈 인터넷 시대의 스승

1982년 5월 15일, 구미에 있는 전자기술연구소 컴퓨터 개발실. 연구원들이 숨을 죽이고 컴퓨터 화면을 바라봤다. SNU. 화면에 서울대학교 영문 약자가 뜨자 환호성과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전자기술연구소와 서울대 연구소의 네트워킹 성공. 한국 인터넷 역사에 파란불이 켜진 순간이었다.

한국 최초 인터넷 접속 프로젝트를 이끈 핵심 인물이 전길남 KAIST 명예교수(박사·71)다. 2013년 6월 7일 조선비즈 연결지성포럼부터 2014년 8월 10일 국제통화에 이르기까지 여러 차례 그를 인터뷰 했다.

일본에서 자라고 미국에서 유학한 까닭에 그의 말은 일본어와 영어 악센트가 있었고, 운동을 좋아한 덕분에 그의 발걸음은 유난히 가벼웠다. 가끔씩 웃음을 터뜨리면 대가의 풍모에서 어린이의 순수함이 묻어났다.

전 교수는 국제적인 안목을 바탕으로 한국 인터넷이 걸어온 길을 차근차근 설명했다. 듣는 사람은 복잡한 문제를 풀어주는 깊이 있는 칼럼 10여편을 읽은 듯 저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 전 교수는 한국과 미국 등을 오가며 2000년대 이후 인터넷 역사를 정리하고 있으며 국내외 과학자들과 활발히 교류하고 있다.

전길남 KAIST 명예교수가 2013년 6월 7일 조선비즈 연결지성포럼에서 ‘한국 인터넷 역사 프로젝트’와 ‘아시아 인터넷 역사 프로젝트’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사진=최지웅 연구원
▲ 전길남 KAIST 명예교수가 2013년 6월 7일 조선비즈 연결지성포럼에서 ‘한국 인터넷 역사 프로젝트’와 ‘아시아 인터넷 역사 프로젝트’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사진=최지웅 연구원

– 1943년 1월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났고 그 지역 고등학교에 다닌 재일교포였습니다. 그런데 교수님께서는 고등학생일 때 한국에 가겠다고 마음을 먹었다고 들었습니다.

“부모님의 고향은 경상남도 거창군입니다. 1939년이었던가요. 세계 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고 일본이 미국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는 와중에 부모님은 일본으로 넘어가셨습니다. 당시 경상도에서는 배를 타고 일본 가는 일이 흔했습니다. 시골에서는 버스도 없었으니까, 서울 가는 것보다는 일본 가기가 더 쉬웠던 시절이었습니다.

나는 오사카에서 수학과 운동을 좋아하는 평범한 학생으로 컸습니다. 1960년 고등학교 3학년 때 학생회장을 맡았습니다. 당시 한국에서는 4·19(1960년 4월 19일 학생과 시민이 중심 세력이 되어 일으킨 민주주의 운동)가 일어났고, 일본에서는 미국과 일본의 군사 협정 체결에 대한 반대 운동(미국과 일본 간의 상호 협력 및 안전 보장 조약·新미일 안보조약)이 거세게 일었습니다.

오사카에서도 큰 시위가 있었습니다. 내가 학생회장이었기 때문에 연설을 해야 하는 데, ‘우리나라가 민주주의를 지켜야 한다’는 말이 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생각하는 우리나라는 일본이 아니었던 거예요. 하하. 무슨 말인지 이해되세요? (결국 그는 연설을 마치지 못했다고 한다.)

그때 내 머릿속으로 내가 한국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고등학교 3학년이라는 나이가 철이 들 나이라고 해야 할까요. 대학교는 어디로 갈까, 앞으로 어떤 일을 할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잖아요. 내가 누구인가를 데모하면서 더욱 명확하게 깨닫게 된 것이죠. 그래서 한국에 가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 미국 캘리포니아주 UCLA(캘리포니아 주립대학교 LA 캠퍼스)로 유학을 하게 됩니다.

“부모님은 한국행을 반기지는 않으셨습니다. 일본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박사 학위를 따야 한국에 갈 수 있다고도 하셨어요. 러시아의 모스크바 대학을 갈까도 생각했지만, 한국에선 모스크바 대학 학위를 안 좋아한다고 말을 듣고는 곧 마음을 바꿔 먹었습니다.

내가 운동을 굉장히 좋아하거든요. 어릴 적부터 산에도 자주 다니고, 수영도 많이 했어요. 날씨 좋은 캘리포니아의 UCLA에 가게 됐어요. LA에 도착한 것이 1966년이었습니다.”

– 1969년 미국 국방부는 UCLA, 스탠퍼드대 등 주요 4개 대학 컴퓨터를 연결하는 ‘아르파넷(ARPANET)’ 개발 프로젝트를 시작했습니다. 이는 오늘날 인터넷이 되었지요. 교수님도 아르파넷 연구에 참여했습니까.

“미국에 있을 때는 인터넷 프로젝트에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평소 정보 처리 분야에 관심이 많아 재미있는 프로젝트라고 생각한 정도였습니다.

당시 인터넷 프로젝트는 미 국방부가 주도했지만, 순수 연구 프로젝트에 가까웠고 전쟁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어요. 그래도 외국인들은 심리적으로 인터넷 프로젝트에 참여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1960년대 후반 월남전이 벌어졌고 미국 사회 전반에 반전(反戰) 여론이 강하게 일어나서 그랬던 것 같아요.

빈트 서프(Vinton Gray Cerf), 존 포스텔(Jonathan B. Postel· IANA 초대 운영자
), 스티브 크로커(Stephen Crocker·아르파넷 프로토콜 개발자) 등 초기 인터넷 개발에 참여한 과학자들이 모두 UCLA 학우였습니다. 덕분에 한국에서 인터넷 개발을 할 때, ‘모르면 친구들에게 물어보면 된다’ 고 생각했습니다.”

2014년 2월 26일 서울 홍은동의 한 호텔에서 조선일보와 인터뷰한 전길남 박사. 전 박사는 한국을 인터넷 강국으로 만들었을 뿐 아니라 아시아 여러 국가에 인터넷 기술을 전파하기 위해 애썼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인터넷 국제표준을 정하는 국제인터넷협회가 선정하는 ‘인터넷 명예의 전당’에 올랐다. /사진=이태경 기자
▲ 2014년 2월 26일 서울 홍은동의 한 호텔에서 조선일보와 인터뷰한 전길남 박사. 전 박사는 한국을 인터넷 강국으로 만들었을 뿐 아니라 아시아 여러 국가에 인터넷 기술을 전파하기 위해 애썼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인터넷 국제표준을 정하는 국제인터넷협회가 선정하는 ‘인터넷 명예의 전당’에 올랐다. /사진=이태경 기자

– 1979년 우리나라 정부의 해외 과학자 유치 프로그램으로 한국에 오게 됩니다. 교수님 나이 서른여섯이었습니다.

“1976년 발족한 한국전자기술연구소(KIET)의 책임 연구원으로 한국에 오게 됐습니다. 구미에 있는 KIET는 반도체, 컴퓨터 등 전자 분야를 주로 연구했고, 나의 임무는 컴퓨터 국산화였습니다. 미국에서 컴퓨터가 서로 연결되는 것을 보고 온 터라 컴퓨터 네트워크를 추가하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첫 번째 네트워크 연구 및 개발 계획은 결재 라인을 통과하지 못했습니다. 다른 프로젝트인 ‘컴퓨터 아키텍처 개발계획’에 네트워크 개발 계획을 넣어 연구를 시작했습니다.”

1960년대 이후 전자산업 분야 신기술 개발은 대부분 정부출연연구소가 주도했다. 1966년 2월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를 필두로 1979년까지 16개가 설립돼 각 분야에서 왕성한 활동을 벌였다. 한국전자기술연구소(KIET), 한국통신기술연구소(KTRI), 한국전기기기시험연구소, 한국에너지연구소, 한국동력자원연구소, 한국표준연구소, 한국기계연구소 등 연구소 대부분은 KIST를 출범 모태로 했다.

– 1982년 5월 12일 구미의 한국전자기술연구소와 서울대 연구소가 전용회선을 이용해 통신에 성공합니다. IP 주소를 할당받고 데이터를 패킷 방식으로 교환하는 오늘날 인터넷과 같은 방식이었습니다.

“당시 구축한 교육 연구망 SDN(Software Development Network)는 아르파넷 개발자들이 만든 차세대 네트워크 프로토콜인 TCP/IP를 이용한 것이었습니다. 당시 TCP/IP로 망을 설계하는 것을 시도한 국가는 미국에 이어 한국이 두 번째였습니다. SDN은 대학 연구소와 기업 연구소들이 효과적으로 정보를 교환하는 컴퓨터 네트워크로 발전했습니다.

전길남 KAIST 명예교수가 지난 6월 인터넷 상용화 20주년을 맞아 열린 '대한민국 인터넷 상용화 20주년과 GIGA 시대' 특별 포럼에서  인터넷 역사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사진=김연정 객원기자
▲ 전길남 KAIST 명예교수가 지난 6월 인터넷 상용화 20주년을 맞아 열린 ‘대한민국 인터넷 상용화 20주년과 GIGA 시대’ 특별 포럼에서 인터넷 역사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사진=김연정 객원기자

– 특히 어려웠던 점은 무엇입니까.

“TCP/IP 네트워크는 서로 다른 네트워크 사이에서 데이터 패킷의 최적 이동 경로를 정해 다음 장치로 전달하는 라우팅 기능이 있습니다. 라우팅 기능을 담당하는 통신 전용 컴퓨터를 구할 수 없어 애를 많이 먹었지요. 냉전 시대라 미 국방성이 관련 기술을 숨겨놨습니다.

우리 연구팀은 처음에는 소프트웨어 방식으로 처리했고 나중에는 국산 컴퓨터로 라우터를 만들었습니다. 국산 라우터는 미국산 라우터와 비교하면 성능은 떨어졌어요. 당시 한국에 운용체제(OS) 전문가가 없었기 때문에 초당 처리하는 패킷 양이 적었던 것이죠. 그러나 세계에서 자기 나라에서 만든 컴퓨터에 국산 라우터 쓴 경우는 거의 없었어요. 그건 자랑스럽습니다.”

– SDN의 의의는 무엇입니까.

“보통 하이테크 기술들은 미국에서 시작하고 일본에서 소화된 다음에 한국으로 오는 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인터넷은 1982년이라는 이른 시기에 일본을 거치지 않고 한국에서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당시 머드 게임(온라인상에서 다수 사용자가 글로 즐기는 게임)을 하는 사람들이 영국 에든버러, 옥스퍼드대, 미국 MIT, 한국의 KAIST 정도였습니다. 그때 게임을 시작했기 때문에 한국에서 온라인 게임이 발달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봐도 될 것입니다.

동시에 안 좋은 점도 있었습니다. 우리는 아무런 준비가 안 되어 있었습니다. 선진국처럼 테크놀로지를 대하는 법을 몰랐습니다.”

국내 최초의 연구개발망인 SDN은 TCP/IP를 기반으로 개발됐기 때문에 한국 인터넷의 효시로 평가받는다. 1983년 KAIST가 SDN에 합류한 것을 시작으로 1990년대 중반까지 국내 대부분의 대학과 연구소가 SDN으로 연결됐다. 1986년부터는 미국의 인터넷인 NSFNET 등 해외의 주요 네트워크와 연결됐다.

/표=최지웅 연구원
▲ /표=최지웅 연구원

– 1982년 말 KAIST 교수로 이직합니다. 컴퓨터를 구경하기도 어려웠던 시절, 교수님의 연구실 SA랩은 컴퓨터를 보유한 유일한 개인 연구실로 꼽혔습니다. 연구실에는 늘 커피 향이 가득했고 교수님이 제자들과 편하게 이야기 나는 것을 즐겼다고 들었습니다.

“연구실 분위기는 굉장히 엄격했습니다. 낮에는 네트워크 연구에만 매진하도록 했습니다. 당시 세계 최고 수준의 나라를 따라잡아야 했으니까요. 시키니까 다들 열심히 했어요. 뭐든 배우려고 하는 모습이었습니다. 하지만 밤에는 연구원들이 하고 싶은 일을 자유롭게 할 수 있게 했습니다. 나는 밤에는 연구실에 일부러 안 갔어요. 연구원들이 머드 게임도 즐기도록 하고요. “

전 교수 연구실은 한국 IT업계의 요람과도 같았다. 그의 제자였던 허진호 아이네트 창업자, 김정주 넥슨 창업자, 송재경 엑스엘게임즈 대표, 박현제 전 솔빛미디어 대표, 정철 전 삼보컴퓨터 대표 등은 한국 IT업계 주역으로 성장했다. 전 교수는 2000년에는 제자 CEO들과 함께 네트워킹 닷넷이라는 인큐베이팅 컨설팅업체를 세우고 대표이사로 활약하기도 했다.

지난 2003년 허진호 아이네트 창업자 등 제자들이 마련한 회갑기념 행사에 참가한 전길남 KAIST 명예교수(제일 오른쪽)
▲ 지난 2003년 허진호 아이네트 창업자 등 제자들이 마련한 회갑기념 행사에 참가한 전길남 KAIST 명예교수(제일 오른쪽)

– 운용체제(OS) 개발에도 관심이 많으셨지요?

“내가 한국에 온 이유는 컴퓨터 국산화였습니다. 컴퓨터를 만들려면 자연스럽게 운용체제(OS)도 필요하니, 관심을 가졌던 것입니다. 실제로 ‘Q-도스(Quick and Dirty Operating System)’를 만든 시애틀 컴퓨터와 협력하기로 했는데, 마이크로소프트가 Q-도스를 사는 바람에 없던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또 KAIST 교수로 막 부임했을 때, 전 세계에서 자유 소프트웨어 운동이 불었습니다. 소프트웨어의 소스 코드를 공개하고 라이선스를 무료로 하자는 운동이었습니다. 그 중심에는 MIT 연구원이었던 리처드 스톨만(Richard Stall man)이 있었습니다. 그와 우연한 기회에 친하게 돼 유닉스를 오픈 소스로 만들기로 의기투합했습니다. 유닉스의 웬만한 부분은 소스가 공개되어 있었지만, 가장 어렵고 중요한 커널 부문은 공개되지 않았거든요.

내 연구실에서 성적도 매우 좋았고 능력도 있었던 친구가 커널 개발 프로젝트에 도전했습니다. 또 스톨만도 한 달 가까이 내 연구실에 머물며 머리를 맞대었습니다. 그런데 이 친구가 벤처 창업을 선언했어요. 당연히 벤처 창업을 하라고 했어요. 내 연구실은 박사 학위 취득보다 벤처 기업 창업을 더 장려하는 분위기였어요. 그 프로젝트는 제대로 진행이 안 됐는데, 결국은 우리보다 조금 늦게 핀란드에서 오픈 소스 커널이 나왔어요. 그것이 리눅스에요.”

리차드 스톨만은 1983년 완전히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소프트웨어로만 구성된 ‘유닉스 호환 소프트웨어 시스템’을 만드는 것을 목표로 GNU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스톨만은 1985년 ‘자유 소프트웨어 재단(Free Software Foundation)’을 세웠으며 1989년 자유 소프트웨어 전용 라이선스인 GNU GPL을 발표했다 .

전 박사는 제자들에게 국가에서 돈을 받고 공부하는 KAIST 학생들은 대학교수처럼 평범한 일보다 스스로 기업을 만드는 것에 도전해보라는 조언을 많이 했다. 다음은 지난 5월 경기도 성남시 판교에서 열렸던 넥슨 개발자콘퍼런스에서 김정주 넥슨 창업자의 말이다.

실제 전길남 박사 랩에서 꽤나 많은 회사가 생겨났다. 전길남 박사님의 연구실은 세계에서 가장 앞서가는 연구실이었고 혹독한 연구실이었지만, 어떻게 그렇게 많은 회사가 만들어졌는지 의문이다.

우리나라의 다른 모든 곳이 진로를 바꾸기가 정말 어렵지만, 전길남 박사 랩은 중간에 그만둘 수 있었다. 앙금이 생기거나 갈등이 생길 수가 있었지만, 전 박사님은 달랐다. 전 박사님은 그래 나가고 싶어? 그래 나가봐봐. 그런 분위기를 만들어줬다. 당시에는 몰랐지만, 너무나 고마운 일이었다.

– 1992년 HANA/SDN 운영 주관 기관이 한국통신(KT)으로 넘어가고 1994년에는 한국 최초의 인터넷 상용 서비스 ‘코넷’ 이 등장합니다.

“1983년까지 정부가 인터넷 개발에 재정 지원을 해주었고, 1984년부터 1990년대까지는 한국통신(KT)이 연구 프로젝트를 지원했습니다. 당시 한국과 미국 전용선을 설치해야 했는데, 1990년 당시 돈으로 20만달러가 들었습니다. 한국통신, 데이콤, 시스템공학센터, 전자통신연구소, 삼성전자, LG전자와 대학교들이 컨소시엄을 만들어 재원을 마련했습니다.

일본의 경우 인터넷 연구는 늦었지만, 미국과의 인터넷 전용 회선 설치는 우리보다 1년 이른 1989년에 이뤄졌습니다. 일본과 한국의 경제규모 차이가 20~30배 났기 때문에 일본에서 20만불은 큰돈이 아닌데, 우리에게는 큰돈이었죠.

이때부터 SDN이라는 이름 대신 하나망(HANA)이라는 이름을 썼습니다. 1992년 네트워크 운영도 KT가 맡았습니다. 2년 후인 1994년 KT가 코넷을 서비스하면서 일반인들도 인터넷을 쓰는 인터넷 상용 서비스가 시작되었습니다. 특히 1994년 월드와이드웹이 등장하면서 인터넷이 크게 인기를 끌게 되었습니다.”

류현정 조선비즈 기자 dreamshot@chosunbiz.com
유진우 조선비즈 기자 ojo@chosunb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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